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한제국 애국가 (문단 편집) == 역사 == 한국 역사 최초의 근대 국가(國歌)이다. 1898년의 가사가 기초가 되었는데 작사자는 미상이다. [[민영환]]이 작사를 했다는 주장이 있으나 민영환은 악보의 서문을 썼고 가사는 여러 학자가 모여 쓴 것이다. 자체 곡이 없을 당시에는 영국 국가 [[God Save the King]]에 맞춰 불렀다. 이후 [[프란츠 에케르트]]가 곡을 붙였다. 1902년 9월 9일 처음으로 연주되어, 정식 채택되었다. 공식적으로는 1907년 [[순종(대한제국)|순종 황제]] 즉위식에서 마지막으로 연주되었다. 1909년에 이르러서는 일제의 애국 창가(唱歌)에 대한 단속으로 인해 금지곡이 되었으며, 1910년 국권을 빼앗긴 이후에는 [[기미가요]]로 대체되었다. 실질적으로는 정식 채택부터 마지막 공식 연주까지 5년 동안만 사용된 비운의 국가이다. 이렇게 작곡된 시기도 어두운 시기였던데다가 음도 착 가라앉은 듯한 느낌을 주는 처량한 분위기라(원래 템포는 Andante 125/ 위권부분은 점2분음표64 템포여서 빠른 분위기의 곡이였다.) 가만히 듣고 있으면 망국의 [[한]]이 느껴진다는 평도 있다. 곡의 분위기나 가사의 난해함, 5년 정도밖에 연주되지 못한 짧은 보급기간 등 여러 악재가 겹쳐 인기가 별로 없었다. 최초의 애국가인만큼 광복 이후에도 쓰일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지만 그러지는 못했다. 한반도에 다시 세워진 나라는 대한제국이 아닌 엄연히 공화국인 대한민국이라 다시 국가로 쓰이기는 어려웠다. 민중에서는 올드 랭 사인에 맞춘 무궁화노래가 애국가로 발전해 불렸다. 작곡가 에케르트는 [[독일 제국 해군]]의 [[군악대]]에서 [[군무원]]으로 근무한 [[독일 제국]]의 [[신민]]이자, [[일본]]의 국가(國歌)인 [[기미가요]]에 화음을 붙여 최종 완성한 [[작곡가]]로서 한국에 건너와 [[대한제국]]의 군악단을 교육했다. 만약에 대한제국이 [[한일합방조약]]으로 멸망하지 않았다면, '동양 두 나라의 국가를 모두 지은 놀라운 이력의 서양인'이 되었을 것이다. 곡에서 느껴지듯이 당대에도 "외국인이 이런 국가를 지어주다니!" 할 정도로 높은 퀄리티의 곡이 나왔고, 스스로도 [[국악]](전통 음악)의 음을 최대한 살리고자 최대한 노력했다. 공식 악보에 쓰인 독일어 해설에 따르면 '한국적 모티브를 본딴 대한제국 국가'(„Kaiserlich Koreanische Nationalhymne nach koreanischen Motiven“)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렇게 해당 국가의 특성을 살린 음악은 기미가요에서도 드러난다. 에케르트는 [[경술국치]] 이후에도 손자 대까지 한국에서 살면서 한국의 음악계를 지원하며 생을 마쳤고, 서울 마포구 합정동의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안장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